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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모시,명주,무명 등 우리 전통 섬유에 대한 자료들을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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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전하는여성] 재미동포 모시 사업가 민영경씨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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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035
 
[도전하는여성] 재미동포 모시 사업가 민영경씨
전통 모시 '한국 명품'으로 세계화

명주와 결합시켜 구겨짐 보완…인니 대통령, 브루나이 왕족 등 동남아 VIP들이 단골


여름에 노인들이나 입는 성글고 거친 옷으로 여겨져왔던 ‘모시’를 세계 1%만을 위한 명품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여성이 있다. 주인공은 바로 재미동포 2세 사업가인 민영경(32)씨. 그녀의 옷은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 브루나이ㆍ말레이시아의 왕족 등 동남아시아 VIP들이 즐겨입기로 유명하다. 말레이시아 공주는 결혼식에 입을 흰색 모시 웨딩드레스를 특별주문하기도 했다. 숄 하나가 120만∼150만원에 팔린다.

숄 하나에 120만∼150만원

민영경씨가 모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친구가 있는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당시 아시아 전체가 IMF 상태였고 화폐 가치가 10분의 1 넘게 떨어졌다. 다들 인도네시아 화폐인 루피아를 팔기에 바빴지만, 민씨는 아버지에게서 빌린 30만달러를 모두 털어 루피아를 샀다. 그녀는 “이를 몽땅 주식에 투자했는데 몇 개월 후 1000만달러를 벌어들여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백만장자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풍부한 자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사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책자에서 한국의 모시를 발견했다.

“우리의 재래종 모시는 가늘면서도 면보다 3∼4배 더 질기고 가벼우면서도 우아합니다. 땀 흡수도 잘되고 박테리아가 안 끼는 천연섬유예요. 일본 모시는 강하지 못하고, 중국 모시는 무겁고, 동남아 모시는 조직이 너무 엉클어져서 밧줄이나 그물로밖에 쓸 수 없거든요.”

민씨는 그 길로 충남 서천군 한산으로 달려갔다. 평생 모시를 짜온 할머니들을 쫓아다니며 반년 동안 모시 농사법, 실뽑기, 천짜기 과정 등을 배웠다. 처음에는 ‘저러다 제풀에 지쳐 떠나겠지’란 반응이었지만 나중에는 민씨의 열정에 할머니들도 감동을 받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한산 모시관에서 전통모시 뿌리를 인도네시아로 가져와서 심었어요. 하지만 생산에 번번이 실패하고 꼬박 3년이 걸려 성공했어요. 모시 재배가 무척 까다롭거든요. 영양분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많으면 잘 자라지만, 땅에 물이 고이면 모시뿌리가 금방 썩어버려요.”

마침내 자카르타 인근의 ‘살락’(60만평)이란 지역에서 1년에 무려 6번씩 모시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그녀는 인도네시아어를 마스터하고 직조과정에 함께 참여했다. 원하는 실을 만들기 위해 ‘오랑우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일에 파묻혔다. 그 결과 민씨는 20승짜리 모시 원사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섬유로 한국에서도 생산이 중단돼 더 이상 명맥을 이을 수 없는 섬유다.

민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시와 ‘명주’의 결합을 시도했다. 모시가 갖고 있는 단점, 즉 훤히 비치고 잘 구겨지고 뻣뻣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전혀 모시 같은 않은, 부드러운 모시가 탄생했다. 때문에 이곳의 모시옷은 땀 흡수가 잘되고 가벼워서 겉에 스웨터를 걸치면 4계절 내내 입을 수 있다. 물론 물빨래도 가능하다. 민씨는 천연 염색기법도 직접 개발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고대 문양을 연구해 천 속에 짜넣었다.

“처음에는 머플러와 숄로 시작했는데 원단이 좋아서 블라우스, 와이셔츠, 속옷도 제작했어요. 속옷은 아토피성 피부에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요. 그 외에 손수건, 이불, 웨딩드레스까지 품목을 다양화했죠. 모두 수작업이기 때문에 소량만 주문 제작되는데 대개 한 달이면 완성되지만 5∼6개월까지 기다릴 때도 있어요.”

2001년 프랑스 파리컬렉션에서 디자이너 겐조가 그녀의 옷을 즉석에서 네 벌이나 구매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민씨의 회사는 직원 300명을 둔, 평균 매출액 180만달러(약 20억원)의 중견기업이 되었다.

“미국·일본·중국에도 갤러리 숍 열 것”

직원들이 이 회사에 입사하려면 ‘남한테 기술전수를 해주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야 한다. 민씨는 한산모시 뿌리에 경호원까지 두고 보관할 정도로 특별히 모신다. 그녀는 “제 사업 덕분에 살락 지역의 많은 가족들이 생계수단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민영경씨는 지난해 12월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했다. 서울 성북동에 본사 겸 갤러리 ‘모시(moshee)’를 오픈했다. 민씨는 “인도네시아에서 모시 붐이 불자 다른 외국 디자이너들이 우리 농장에서 정보를 빼가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을 보고 이전을 결심했다”며 이전 이유를 밝혔다. 생산기지는 인도네시아에 그대로 둔 채, 본사에서는 해외 마케팅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미 국내에도 소문이 나서 지난해 6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천황 영애(令愛)와 가와구치 요리코 외상을 위한 선물로 민씨의 모시를 준비해갔다. 민씨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인 모시가 당대에 명맥이 끊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향후 일본과 중국, 미국에도 갤러리 숍을 열어 세계적인 ‘모시 전도사’로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란희 주간조선 기자(rhpark@chosun.com)


인도네시아에서 빛난 ‘모시 박사’ 민영경

“한국 모시는 최고의 섬유…세계인 입혀야죠”

미국 캘리포니아대 경영학과를 막 졸업한 한 교포 2세 여성이 있었다. 보수적인 이민 1세였던 그녀의 부모는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기만 바라고 있었다. 주말마다 ‘제발 만나서 차 한 잔만 마셔봐라’는 부모의 성화에 시달리던 그녀는 여름휴가 삼아 친구들이 많은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지난 97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인도네시아에 가자마자, 아시아 전체가 IMF 경제위기에 휩싸였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화폐가치가 10분의 1로 떨어지고 살인적 물가상승에 폭동이 일어나는 등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서 뜻밖의 기지를 발휘했다.

‘아무리 혼란스럽다고 해도 인도네시아는 천연자원이 많고 싼 노동력도 풍부한 나라야. 절대 이대로 망할 리가 없어.’ 그녀는 자신의 여행경비는 물론,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까지 다 털어 인도네시아 화폐인 루피아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이 ‘일생일대의 결단’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20대 초반의 처녀는 불과 몇 개월 만에 몇 백만 달러를 손에 쥔 백만장자가 되었다.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민영경씨(31)의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백만장자로 일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가난에 시달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불어난 자금을 들고 민영경씨는 적당한 사업거리를 찾아 나섰다. “평소에 미래 산업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이거나 자연자원을 그대로 이용한 천연소재 산업이 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어요.” 원래 섬유에 관심이 많았던 민씨는 후자를 사업소재로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주목한 섬유는 모시.

“모시는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감는 천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고급 섬유죠. ‘중국풀(Chinese Grass)’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모시의 종류는 아시아권에만 150가지가 넘어요. 현재 세계시장의 90%는 가격이 싼 중국산 모시가 장악하고 있고, 또 일본 같은 경우는 정부 차원에서 ‘쇼와 빌리지’라는 모시재배촌을 조성해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죠.”

그러나 민씨는 150종류의 모시를 모두 살펴본 후, 가장 우수한 모시는 한국 모시라는 결론을 내렸다.

꿈의 20승 원사 생산 성공… 각국 상류층이 주요 고객

“모시의 특성은 질기고 가벼우며 우아하다는 점이죠. 한국 모시는 이 같은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요. 손으로 직물을 짜는 데 익숙한 인도네시아인들을 교육시켜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한국 모시를 생산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민씨는 자카르타 인근의 ‘살락’이라는 산 중턱에 60만 평의 땅을 산 후, 100명의 현지인 농부를 고용했다. 이때부터 아무런 소득도 없이 연구와 개발, 교육에 땀과 자금을 쏟아붓는 고단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민씨는 현지인들에게 모시 재배와 직조 과정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도네시아어부터 배웠다. 그리고 모시의 본고장인 한산에 가 모시풀 재배법과 껍질을 벗겨 손가락으로 훑고 쪼개어 실을 만드는 모시의 직조 과정을 일일이 전수받았다. 한국에서 모시 뿌리를 가져갈 때는 행여 상할세라 직접 포장해 아기처럼 안고 가기도 했다. 최고급 모시를 생산하기 위한 5년간의 아낌없는 투자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한산에 계신 모시 전문가들을 인도네시아에 초빙해 교육을 맡겼는데 아무래도 언어 장벽 때문에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인도네시아어를 아는 제가 모든 과정을 다 가르쳐야 했어요. 5년 이상 친구도 없이, 휴일도 없이 오로지 모시 재배와 연구에만 매달렸죠. 매일 산에서만 산다고 해서 ‘오랑우탄’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어요.”

‘모시 박사’가 된 민씨는 결국 최고로 가늘고 섬세한 20승짜리 모시 원사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최고 1미터 높이까지만 자라는 모시풀도 인도네시아 현지 농장에서는 2미터 가까이 키워냈다. 그가 직접 보여준 20승 원사는 한국에서도 생산이 중단돼 오로지 기록에만 남아 있는 전설적인 모시. 말 그대로 ‘머리카락보다 더 가볍고 잠자리 날개 같은’ 꿈의 섬유다. 민씨는 ‘이 실로 옷을 만든다면 아마 박물관 같은 데에 전시될 만큼 기념비적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민씨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모시와 명주를 합성해 잘 구겨지는 모시의 단점을 커버하는 데 성공하고 천연 염색 기법도 직접 개발했다.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고대의 여러 문양을 연구해 천 속에 짜 넣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을 모두 거쳐 탄생한 민씨의 모시 숄은 시가 150만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명품 중의 명품. 천연 염색으로 낸 은은한 색감과 가볍게 흘러내리는 질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모시(Moshee)’ 브랜드를 단 숄은 지난해 미국 뉴욕의 다카시마 백화점에 입점했고 프랑스 파리 컬렉션에도 선을 보였다. 파리 컬렉션에서는 겐조의 디자이너 등 쟁쟁한 패션 전문가들이 모시의 아름다움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용감했던, 아니 무모했던 민씨의 도전은 이제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 ‘모시’ 브랜드의 매출액은 180만 달러.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의 왕족,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총리, 각국의 대기업 총수 부인 등이 그녀의 고객이다. 말레이시아 공주는 결혼식에 입기 위해 민씨에게 흰색 모시로 만든 웨딩드레스를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 현재 ‘모시’ 브랜드는 숄, 머플러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드레스 셔츠 등 보다 다양한 품목을 제작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에 300명의 생산 인력이 있는데, 이 인원을 2, 3년 이내에 2만명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무래도 외국인이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느낄 때가 많아요. 장기적으로는 본사를 한국으로 옮길 생각이에요. 한국에서 제가 사업을 소개하면 ‘젊은 여자가 정말 기특하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참 뿌듯해요. 제가 한국인인 게 자랑스러울 뿐이죠.”

‘한국 모시의 우수성은 세계 어느 섬유에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정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분들이었다’고 모시 자랑이 끊이지 않는 민영경씨. 그저 얌전해 보이는 이 젊은 여자의 어디에 그처럼 엄청난 결단력과 추진력이 숨어 있었을까. ‘꿈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사업적인 성공은 이제부터’라고 단단한 각오를 내보이는 민씨에게 ‘어떻게 그러한 성공이 가능했나’라는 우문을 던졌다. 그러자 민씨는 ‘이게 내 운명이다. 하지만 두 번 하라면 못할 것 같다’며 살포시 웃었다.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351/wd351kk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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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모시박사 민영경씨

방송일: 20021125   동영상 :  

 

가제: 인도네시아의 모시박사

 

방영일시: 2002년 11월 25일 월요일 밤 12:00~12:50

주요내용:

인도네시아 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이 머리에 두르고 있는 숄은 색도,
문양도 가지가지이다. 엄격한 이슬람 규율 사이로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 엿보인다. 미모의 젊은 한국인 사업가 민영경씨의 모시
제품은 인도네시아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최고급 숄로 꼽힌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천연색은 이곳 여성들의 까무잡잡한 피부색과 잘
어울린다. 실용성을 따지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통풍과 땀 흡수가
잘되면서도 질긴 모시는 단연 인기 최고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모시’라는 한국말이 이제 친숙하다.



재미교포2세로 미국에서 태어나 경영학을 공부한 민영경씨는 한국을
알기 전, 먼저 모시를 알게됐다. 알면 알수록 모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민영경씨의 고생도 시작됐다. 파리 명품 패션쇼에서 찬사를 받기까지
얻은 별명은 ‘오랑우탄’. 모시 만들기에 열중하느라 인도네시아
산중에서 베틀을 옆에 끼고 묻혀 지내는 동안 가족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한산에서 캐온 모시를 한뿌리 한뿌리 직접 심고, 한산모시
장인들에게 전수 받은 기술을 원주민들에게 가르쳤다. 천연 염색법을
응용해 모시에 색을 입히기까지. 민씨의 거친 손이 그간의 여정을
말해준다.



민씨를 힘들게 하는 건 주변의 편견이다. 젊고 싱글인 여자가
사업전선에 뛰어든 걸 보면 분명히 누가 도와줘서 할 것이라고 할 때는
너무 속상해 혼자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문다고 한다. 미국에서 학교
졸업한 후 막내딸이 고생하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던 부모님 생각에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보다 유난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부모 속도 많이 썩여 극성스럽다는 소리를 들었던 민영경씨는
그래도 모시와 함께 사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한국의 모시를 세계의 명품으로 만들 겁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는 젊은 여사장 민씨의 다짐이다.



출연자:민영경(31)
담당PD: 임혜선 프로듀서
기타1:촬영: 오봉희, 글.구성: 이영옥, 연출: 황명옥
E-메일: www.docu3.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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